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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아바타 - 하트와 브래지어
 
                                                                                                                                                    김영민 | 전시기획자
 
물신(物神)은 다양성과 수에 있어서는 힌두의 신들을 방불케 한다. 창조와 유지, 파괴를 담당하는 세 명의 신이 변형과 변신을 거듭하여 힌두 인구만큼의 신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힌두 사람들은 각각 유사하지만 다른 자신만의 신들을 가지게 되었단다. 현대의 물신도 유사하지만 각기 다른 형태로 각자의 종교가 되어 신봉되고 각각의 욕망의 아바타가 되었다. 물신은 형태는 다양하나 기실은 매 한가지이다. 단지 욕망의 아바타가 다양한 물건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물건은 신이 되었고 다양한 변형을 통해서 인간의 욕망을 지배하는 아바타들이 되었다. 신의 아바타로서 물건들은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한편 인간의 욕망과 기원의 상징이 된다. 물신은 욕망 그 자체, 혹은 나르시스에 대한 은유가 된다.                                                    
박경주가 미술계에 등장한 지난 세기, 그녀의 작업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형식적인 실험, 조금은 급진적인 혹은 사회적으로 말하기를 꺼려하는 불편한 것‘들’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한다는 것으로 모아졌다고 기억한다. 그녀의 작업에 대한 진술이 많이 남아있지 않아 단편적인 진술들과 기억들을 모아보면, 은폐된 혹은 은폐하고 싶어 하는 내밀한 욕망들을 파편적인, 게다가 크게 관련없는 사물들의 배열에 의해서 드러나게 하는 방식의 작업으로 귀결된다. 예컨대 도로 표지판이나 일상적인 신호들을 개인적인 방식으로 재배열하여 은폐된 일상을 드러내는 식이었다. 게다가 그 욕망이 가리키는 곳에 작가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욕망의 산만한 자술서처럼 보였다. 게다가, 그녀는 대학에서 도예를 전공했고, 노는물도 그곳이어서 좀 더 이질적인 불편함이나 급진적인 모습으로 각인되었다. 옷매무새나 머리모양, 화장 같은 것도 그녀의 작품을 보조하는 역할을 한 듯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그녀의 파격적인 작품들 혹은 그녀가 파편적 편린으로 사용하는 표지와 표징들 그리고 표현 방식들은 이제 더 이상 불편하지 않게 되었다. 사회적 금기들은 점점 헐거워지고 ‘개인’은 현대미술의 내적 충만이나 논리 같은 강령보다 더욱 중요하게 미술행위들 속에 자리 잡았다. 예술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개인의 욕망을 표시하는 다양한 표지들이 전파처럼 대기를돌아다니며 나름의 맥락을 형성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녀의 내밀한 나르시스로서의 욕망은 상징이 아니라, 이제 당연하게 사고파는 상품이며, 그 상품들이 모든 것을 설명할 뿐 아니라 사회를 지배하는 물건의 왕국이 되었다. 은폐되거나 거세된 욕망은 복권되었고 예술은 강림하여 편의점에 진열되었다.                                   
그녀의 연표를 살펴보면, ‘환상(the fantastic)’이란 말이 개인전 제목에 쓰인 것이 2000년이다. 환상식탁, 환상인간, 환상공간, 환상놀이…, 뭐 이런 식이다. 처음에는 환상 자체가 제목인 적도 있다. 매우 오랫동안 박경주의 작품들에 환상이란 말이 붙인 것은 그녀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환상이라는 말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녀만의 맥락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은 매우자연스러운 일이다. 흔히 ‘환상적인’이라는 표현은 매우 놀랄만하거나 현실에서는 구현되기 힘든, 혹은 매우 정교한 솜씨로 우리를 현혹하는 경우에 쓰인다. 그러나 박경주의 환상은 장난감 가게에서 ‘이거 꼭 가지고 싶어!’ 라고 떼쓰는 아이 혹은 어린아이 종이인형놀이 같아 보인다. 어른들의 세계를 모사(模寫)했지만 모사의 취사선택이 우리의 삶이 가진 리얼한 세계에서 비켜나서, 화 려한 색과 다양한 젤리들이 가득 담긴 플라스틱 상자를 통째로 가졌을 때의 느낌이랄까? 하여튼, 심리학적으로 좀 퇴행적이고 본원적인 욕망에 닿아있다고 할 수 있다.                                         
박경주의 환상은 사유의 주체로서 실제(real)와 접촉하는 순간 만나게 되는 쾌락이 아니라 결핍을 메우는 소유관계에서 발견하는 것들이다. 즉 억압된 욕망이 소비라는 말로 대표되는 물건 혹은 상징에서 일시적으로 해소되고 충족되는 것이 ‘판타스틱’이라는 말에 들어있다. 따라서 박경주의 ‘판타스틱’은 욕망의 연쇄처럼 충족되지 않고 고구마 뿌리처럼 연쇄된다. 따라서 의미관계에서도연쇄적이고 중의적이고 산발적이며 일정부분 조롱을 포함한다. 재미있는 것은 조롱의 대상이 주체로서의 욕망과 쾌락이 이르지 못한 자기 자신의 관계지향적 욕망이자 쾌락이라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자기 자신을 비추는 거울 혹은 샘물의 역전된, 좌우가 뒤바뀐 형상이 환상을 만드는 근원이다. 그래서 그 환상은 실체와 만나지 못하고 떠돈다. 거울은 유사하나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박경주의 ‘판타스틱’이라는 말은 실체(substance)가 아닐 뿐 아니라 실재(reality)하지도 않는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좌우가 뒤바뀐, 유사하나 실재가 아닌 거울에 보이는형상이 ‘판타스틱’이다. 그래서 그녀의 환상적인 작품들은 자신이 욕망을 반영하나 주체로서 혹은 본원적인 욕망이 아니 라 거울에 반영된, 사회에 비춰 만들어낸 소비의 산발적인 물건 이미지들이 되는 것이다. 그녀가 주목하는 것은 물건이 상징으로 소비되고 가치를 획득하는 시대 혹은 물건만이 말을 하는 시대의 인간이 가지는 여러 가지 변주와 모습들인 것이다. 환상적이라는 말은, 우리의 삶처럼 거처 없이 떠도는 유령이자, 거울인 것처럼 공허하다. 그러나 실재가 아닌 거울일지라도–거울이 아니면 실제를 확인할 수 없으므로- 그곳에 거처(space)를 마련하고 세계를 구성하려는 의지가 환상이라는 말에 담겨있다. 환상은 실재의 거울이지만, 실재를 확인하는 통로이자 가상현실로써의 현실이다. ‘사고 파는’ 물건들은 인간 욕망의 상징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 인간을 설명하고 존재를 규정하는  신이 되었다. 그러면 그 환상이 세계일 수밖에 없다고 작가는 말하는것 같다.
현대 소비사회의 나르시스적 이미지
‘환상’시리즈에 국한하자면, 박경주 작업의 특징은 각각의 사물 간의 유기적인 결합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각각의 이미지 혹은 사물들은 운전면허 시험의 문제은행처럼 제한적이다. 잘 살펴보면 소비와 관련된 나르시스적인 이미지들은 그 수가 매우 한정적이다. 이미지들은 전형적(typical)으로 특성이 부여되고, 형태들은 상호 조합을 통해서 맥락을 구성한다. 대중적으로 소비되는 이미지들을 작가 특유의 방식으로 축약하거나 일정한 패턴으로 만들어 결합가능성을 매우 높여놓았다. 이미지들은 결합 혹은 조립하면 새로운 맥락의 말이 된다. 문제은행에서 꺼낸 이미지들을 구성하고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지속적으로 새로운 맥락을 형성하면 그 맥락은 각각 다르지만 전형적인 이미지들의 조합이므로 서로 유사하고 낮선 조합들도 금방 익숙해진다. 대부분의 작품이, 주제에 해당하는 주도적 이미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에 보조적 이미지가 결합하는 형태로 맥락을 구성하지도 않지만, 미묘하게 이미지로 떠돌지 않고 총체적으로 자신을 발언을 한다. 각각의 이미지들은 파편적이지만 그 파편들이 결합하여 이야기를 만든다. 이야기들은 다양하고 이미지의 조합은 끝이 없다. 간혹, 점박이들이나 속옷 레이스 문양의 형태만이 결합된 추상의 형태로, 단지 시각적으로 읽히기도 한다. 하트, 여성용 가방이나 굽이 높은 구두, 여성용 액세서리, 비행기, 브래지어, 거울, 무대 같은 텔레비전 특히 눈물 혹은 눈물이라고 여겨지는 각종의 액체들이 거의 무작위로 묶여서 말을 한다. 제한적인 이미지들의 결합을 통해서 ‘구성’하는 박경주의 작품들은– 쉽게 -랜티큘러가 되고 라이트 박스, 가구, 가방, 부채 혹은 영상이 되어 설치되기도 한다. 형식과 매체에 있어서 전방위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지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박경주 작업의 특성상 매체를 확장하기 쉬운 특성을 반영할 뿐, 여전히 그녀의 본령은 형태 지향적이고 조형적(plastic)이라는 것이다. 미술에서 표현할 재료와 기법을 선택하는 문제는 작가가 보여주려는 세계와 연관되어 있다. 작가의 손은 정보의 저장소이자 최종적인 형태가 만들어지는 마지막 머리이다. 혹은 부지불식간에 나타나는 학습된 결과이다. 박경주의 흙으로 만들고 채색하여 구운 작품들은 여전히 도예적이다. 여기서 도예적이라 함은 좌대 위에 제작된 작품을 올려놓은 방식을 여전히 따른다거나, 지지대 위에 사물을 구축하는 방법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아래에서 위쪽으로 제작하고 위에서 아래로 읽어낸다는 측면에서 도예작품의 전시형태를 따른다. 이것은 작품 감상에 있서 고전적인 방법을 따르게 하여 감상자의 노력을 감소케 해준다. 주로 파편적인 이미지들로 구성되거나 표징들이 공간 안에서 떠도는 작품들이 형식의 과잉으로 내용의 난해함을 조장하거나 표징 자체가 기호로 읽히지 않는 데 반하여, 그녀의 작품은 매우 명료하다. 발언의 형식이라는 면에서는 잘 다듬어진 매끄러운 말투의 단정함이 묻어나고 가벼워진다. 아마도, 구조주의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결핍과 욕망 그리고 욕망의 환유, 상징계 이전의 본래적인 욕망 같은 공허하고 복잡한 말들을 고전적인 방식으로 가지치고(剪枝) 가볍게 관람자에게 던지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이것이 그녀의 기질이자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모호함이라는 매력이나 예술적인 허영보다 작가의 손이 만든 오래된 직관이 돋보일 때가 있다. 그녀의 평면작업, 예건대 렌티큘러나 드로잉상의 이미지들도 매우 조형적이고 형태 지향적이다. 3차원의 것들을 2차원의 평면에 구현할 때 나타나는 면적 요소가 선적 요소를 주도한다. 작가의 손이 형태를 만들고 그 형태를 다듬어 완성시키는 프로세스와 여전히 맞닿아 있다는 생각을 그녀의 평면작업을 보면서도 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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